조개껍데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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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의 교란을 걷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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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을 맞아, 79년 전 오늘 - 1945년 8월 15일을 상상해본다. 광복光復절, 문자 그대로 풀자면 ‘빛이 되돌아온 날’이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 말이다. 일본 입장에선 어땠을까? 특히 식민지 조선에 살고 있던 재한 일본인이었다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본국의 패망 소식을 들었던 이들이 겪은 광복과 그 이후의 삶은 어땠을까?
발행일
2024/08/15
업데이트 날짜
2024/09/17
광복절을 맞아, 79년 전 오늘 - 1945년 8월 15일을 상상해본다.
광복光復절, 문자 그대로 풀자면 ‘빛이 되돌아온 날’이다. 물론 우리 입장에서 말이다. 일본 입장에선 어땠을까? 특히 식민지 조선에 살고 있던 재한 일본인이었다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본국의 패망 소식을 들었던 이들이 겪은 광복과 그 이후의 삶은 어땠을까?
이 궁금증이 든 건 아주 최근 일이다. 아주 오랬동안 이 문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 어느 대화 중 테이블에 올려진 화두가 있었으니…바로 ’광복 후, 그러니까 일본 입장에서 패망 후 조선 땅에 살고 있던 일본인을 향한 폭력이 없었을까? 매우 있었을성 싶은데, 우리는 이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잖아. 이런 폭력은 어떻게 봐야할까?’의 문제.
광복 79주년을 기념하며, 이 문제를 좀 들여다보자.
일본 군국주의, 제국주의는 일본 제국의 영역을 개발하기 위해 자국민(중산층 및 하층민 출신이었다)을 아시아, 시베리아, 태평양 각지로 진출시켰다. 패전 직후 이들의 수는 650만 명에 달했으며, 그중 90만 명은 조선에 있었다. 1945년 패전을 조선에서 맞은 일본인들은 한반도를 탈출하며 꽤 많은 수기를 남겼다.
<조선을 떠나며>는 이 일본인들이 남긴 수기, 일기, 회고록 등 텍스트를 성실히 수집해 들려주는 동시에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알 수 있는 맥락을 설명한다. 이 이야기에는 귀국파와 잔존파로 나뉘었던 재한 일본인, 일본인 중에서도 빠른 귀환을 할 수 있었던 권력층, 무능한 조선총독부, 본토 일본인, 조선인, 미군정, 소련군의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들어있다.
예상 가능하듯, 재한 일본인들은 심리적 충격과 혼란, 공포,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급속도로 궁핍해진 살림살이, 각종 사건 사고를 겪었다. 그리고 이 고통과 굴욕의 경험은 이들에게 아주 오랫동안 상처로 남았다. 그 중 눈길을 잡아 끈 몇 부분을 추리자면 아래와 같다.

갑자기 조선인들이 이토록 많다는 것을 인지하다, 그것도 매우 화난 조선인들이

일본인이 남긴 수기들 중 예상치 못한 대목이 있다. 패전 후에야 주위에 조선인들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는 대목이다. 조선에 살면서 조선인의 존재를 뒤늦게 깨닫고 화들짝 놀라는 모습. 아이러니다.
이 아이러니의 맥락은 이렇다.
일단 일본인과 조선인은 사는 지역이 분리돼 있었다. 그리고 식민 지배 기간 동안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풍경 같은 것이었다. 특히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은 조선을 철저히 본토 일본의 일부로 여겼고,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는데 유순하게 협조하는 동원력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일본인과 조선인이 일터에서 섞이거나, 인간적인 관계를 주고받은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지배국-피지배국의 위계 안에서 이뤄진 일종의 착취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인간적인 교류를 주고받은 몇몇 예외적 경우는 조선인이 ‘일본적인, 즉 근대적인 요소’를 구비했을 것이라고 여겨질 때만 자신들과 소통할 자격이나 가치를 부여해 가능한 것이었다.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조선인이 있다는 사실을 생경하고 공포스럽게 느낀 일본인들의 체험은 이런 맥락 안에서 봐야한다.

‘마담 다바이’

‘마담 다바이’는 광복 후 북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놀이다.
마담 다바이. 러시아어로 ‘부녀자를 내 놓아라’는 뜻이다. 놀이 방식은 남자 아이들이 나뭇가지 따위를 쥐고 “마담 다바이, 다바이!”라고 외치며 여자아이를 쫓아가 둘러싸는 것이다.
(이걸 놀이로 봐줘야 하나? 싶긴 하지만….) 애들 놀이에 등장할 정도로, 소련군은 일본 여성 대상 성폭력 사건을 많이 저질렀다. 북에서 탈출한 일본 여성들 중에는 성폭력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경우가 많았고, 일본은 이 여성들에게 강제 낙태 시술을 하기 위한 보양소를 설치한다. 성폭력 사건은 북한에서 살던 일본인들의 귀환기에 주요하게 등장하는 소재다.
미군정이 들어온 남한의 상황은 조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을 벌이며 수많은 여성을 성노예로 동원했던 일본이었기에, 그 버릇 남 못 주고 남한의 일본인 유지들은 ‘미군을 상대할 일본인 위안대’를 꾸리려 했다(다행히 욕만 먹고 실제 꾸리진 못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우려와 달리 미군은 성범죄를 많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한다. 예상보다 체계가 잡혀 있었고, 소련군과 달리 ‘현지 조달’을 하지도 않았기에 민간인과의 접촉 자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여성들이 겪은 직접적인 피해와 고통, 일본으로 귀환해 본토에서 겪어야 했던 멸시까지 - 그야말로 전형적이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그 폭력을 고스란히 받은 것은 어김없이 여성들이었다는 점이 그렇고 그 구체적인 패턴이 그렇다.

맥락의 교란을 걷어내고

여성들이 겪은 성범죄를 비롯해 조선땅의 일본인들이 겪어야 했던 ‘지옥과도 같은 공포와 폭력’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일본인 귀환기 중 유명세를 탄 <요코 이야기>를 어떻게 봐야할 지에 대한 논의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출처: 한겨레신문
<요코 이야기>는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가 북한을 탈출해 일본으로 돌아가며 겪은 경험을 쓴 귀환기다. 요코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해 패전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가해행위’를 기술하고 있다.
예상 가능하듯 <요코 이야기>는 한인들에게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과연 이야기에 등장하는 조선인들의 ‘가해행위'가 진짜였는가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져물었다. 논픽션 회고록 형식을 가진 글이기에 유효하고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해당 텍스트 원문을 읽어보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나는 <요코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그가 기억하고 경험한 실제라고 본다. 여성은 성폭력에 대한 직간접적 경험을 지어내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 경험을 공적 자리에 내놓는 것이 스스로를 얼마나 안전하지 않게 만들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혹 <요코 이야기>에 사실 및 진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악의적 의도라기 보다는 기억의 한계 내지 (요코 한정이 아니라, 일반론으로서의) 개인의 한계라 본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저자 개인을 향해 혹여라도 비난 일변도를 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동시에 꼭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요코 이야기>류의 이야기가 자신이 의도했은 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어디에 복무하느냐의 문제다.
<조선을 떠나며>의 저자는 이 <요코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개개인의 체험은 그것이 누구의 경험이든지, 또 어떠한 내용이든지 그 나름의 절대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 원체험에 대한 당사자의 인식 또한 적어도 사적 영역에서만큼은 그 자체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
지당한 이야기다. 저자의 말을 이어 들어보자.
그러나 이것이 한 사회의 집단적인 인식이나 공적 기억의 장으로 여과 없이 옮겨질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 중략 ) 원래 개인의 원체험이 기억의 영역으로 정착되기까지는 사후 학습이나 타인으로부터의 추체험, 그가 속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라는 다양한 외적 변수가 작용한다. 요코 가와시마는 해외에서 비참한 귀환과 본토 정착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궁극적 책임을 일본의 전쟁 도발에서 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구사하는 비판의 시선과 논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구 식민지에 대한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을 회피하고, 국민 통합을 위해 내걸었던 전후 일본의 전형적인 내러티브, 즉 ‘휴머니티’와 ‘평화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녀 역시 전후 일본 정부가 유포한 ‘전쟁 피해자론’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실상 <요코 이야기>가 초래한 가장 큰 문제는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가해와 피해의 맥락을 교란시켰다는 점이다. (중략) 양국이 가해와 피해의 기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근원적으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중략) 전쟁으로 인해 한일 양 민족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면 가해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에 대해서 정합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이같은 저자의 주문은 단지 과거사 문제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계속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전쟁) 폭력에도 유효하다.

글을 나가며

오늘 새벽, 그러니까 광복절이 시작된 시각 - KBS는 <나비부인>을 송출했다.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일제로부터 빼았겼던 국권을 되찾아, 그것을 ‘빛이 되돌아 온 것’에 비유해 기념하는 광복절 제79주년 새벽 벽두부터 공영방송을 타고 울려퍼졌다.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