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때 촘촘하게 계획을 세워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는 후자다. 관광 모드 보다는 로컬의 정취를 느끼려는 여행가 타입? 여유와 계획 없음에서 오는 우연성을 즐기는 낭만적 타입? 그런거 아니다. 그냥 계획하는 게 너무 어려운 극 P인지라…동선 짜기나 숙소 예약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과제로 느껴져서다.
그리하여 한 장소에 이틀 이상 머물다보면 십중팔구 그 곳 사람들, 동물들과 안면 틀 기회가 생긴다. 특히 여행지에 사는 개 고양이는 대개 경계심이 낮아서 금새 엉덩이고 배고 쓰다듬을 수 있게 된다.
이번 여행에서도 안면을 트게 된 개가 있다. 바로 아래 아기다. 어느샌가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개라고 했다.
△ 이번에 여행지에서 만난 개
순하고 예쁜 눈을 가졌다. 나이는 이제 막 한 살을 넘긴 것 같다. 사람으로 치면 20대 초반 - 몸은 다 컸는데 삶에 대한 호기심과 에너지는 10대의 그것과 비슷한, 아직 생의 권태를 맛보지 않았을 것 같은 나이. 이 애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진 검은 털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벼룩도 가지고 있다는 점.
MBTI로 글을 열었지만, 사실 하고 싶었던 건 개 벼룩 얘기다.
풀어놓고 키우는, 혹은 주인 없는 개에게 벼룩은 꽤 흔한 것 같다. 생명에 지장을 주지는 않겠지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벼룩은 계속 알을 까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견생의 질을 치명적으로 저하할 수 있다.
이 성가신 개 벼룩은 꽤 쉽게 치료할 수 있다. tick remover를 목덜미에 한 번 발라주면 - 땡. 수의사 친구에게 이걸 듣고, 나는 순박한 눈을 가진 털복숭이 녀석의 벼룩을 그냥 지나치지 않기로 했다.
— 의식의 흐름 —
그렇다면 요는 틱 리무버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인데…. tick remover는 전 세계 어느 동물병원, 펫 숍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나는 콜 택시를 부르려면 최소 반나절 전에는 전화통 붙들어야 하는 굉장히 외진 곳에 와있다. 흠, 그렇다면 쿠팡…? 아 아니지. 아마존이나 이베이..? 아 이 옵션은 배송에 얼마나 걸릴지 감이 안 오기 때문에 패스. 결국 택시를 타야 하나? 택시비 장난 아닐텐데..? 아니, 그보다 유난에 오지랖은 아닐까? 사실 오지랖은 괜찮지만, 너무 선택적 오지랖인가..? 너는(나는)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것 같은 상황 A, B, C를 그냥 지나쳤잖아. 왜 A, B, C는 그냥 지나치고 고작 개 벼룩에 이토록 신경쓰는 거냐. 이런 선택적 오지랖이 도덕적으로 괜찮냐 이말이다..! 하… 이렇게 머리가 아플 바엔 그냥 일관되게 무관심한 게 낫지는 않을까? 그럼 돈도 시간도 안 쓰고 도덕이니 뭐니 고민 안 해도 되잖아.
그나저나…. 세상 사람들 다 중요한 일들로 바쁜 것 같은데…. 나도 더 중요한 이슈들에 내 시간과 열정을 써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더 중요한 이슈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뭐란 말인가..? 비현실적으로 목가적인 곳에 덩그라니 앉아 개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 생각이 너무 많아진다 - 위험하다. 간단히 가자. 다시 개 벼룩에 집중하자! 개 벼룩. 약 한 번 바르는 - 정말 아주 간단한 조치로 퇴치할 수 있다. 벼룩이 없는 삶은 벼룩이 있는 삶보다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쾌적하다. 인풋 대비 아웃풋을 생각했을 때, 이건 좋은 액션이다. 오케이 - tick remover를 구해보겠어 - !
(의식의 흐름 끝)
△ 강아지 몸무게에 따라 S - M - L 용량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여러 곡절 끝에 이 tick remover 두 통을 손에 쥐었다. 한 통을 뜯어 목덜미 털을 양옆으로 뉘이고 잘 발라준다. (손에 뭍어도 문제 없다) 이 간단한 조치로 벼룩 박멸(기대). 약효가 확실하게 지속되는 기간은 한 달. 한 달 후 운이 안 좋다면 다시 벼룩에 옮을 가능성도 있을 것. 이 경우를 대비해 남은 한 통을 숙소 매니저님께 맡겼다.
이런 일련의 일을 통해 다짐한 것은 아래와 같다. 다음번에 또 어딘가 여행할 일이 생기면, tick remover를 짐에 챙겨가겠다는 것. 낯선 곳에서 tick remover를 구하는 것은 녹록지 않을 수 있으니까. (참고로 한국 동물병원 및 펫숍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약효과 좋은 브랜드는 프론트라인/FRONTLINE이라고 추천받았다.)
세 줄 요약
1. 개 벼룩은 전 세계 모든 동물병원, 펫숍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tick remover를 목덜미에 발라주는 것만으로 꽤 효과적으로 박멸할 수 있다.
2. 즉 인풋 대비 아웃풋 좋게 견생 하나를 구할 수도 있다는 것
3. 벼룩은 있는데 반려인은 없는 개와 친해지는 경험은 대개 여행지에서 하게 되므로 여행 가방에 tick remover 하나씩 챙겨 다녀야겠다.